약봉지 땅에
떨어져 있다
누가 흘렸나 아님
버렸나
주황색 알약과
녹색과 미색 섞인 캡슐
흰색 작은 또 알약
식후 30분에 먹으라고 돼 있는
누가 혹시나
이 약 없으면 안될
그 누구가
약을 흘렸나
지겨웠었나
강박의 일상
무너지는
스러지는
어느 순간 숨이
턱 막힐 만큼
뜨거운 것이 치받는
손 휘저어 버릴 만큼
놓아 버리고 싶을 만큼
서울역 지하도
가로놓은 돌길 한 가운데
던져 버렸나
아직 뜯지 않은
금방 놓인 약봉지
멈추고 서서 물끄러미
------------------- 171127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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저것들
공중에 둥 둥 떠 다니는
중국
아니면
덴마크 핀란드
어디서 온 것들이든
때깔은
기막힌 것이
한 올 한 올
하늘거리는
살았을 적보다
더 윤기 나도록
생생하도록
사후처리가
기막히지 않나
생시에 없을
씻기고
빗기고
끔찍이
끔찍하게
목덜미 시큰한
어차피
같은 꼴이다
부지불식간
목덜미 잡혀
가쁘게 숨 몰아 쉴 테다
같은 목숨이다
그러니
고개 돌리라
붉게 물든 눈으로
내려다 보지 말아라
좁게 이어진
지하 통로
줄지어 고개 숙인
사람들
목덜미 뒤로 둥 둥
------------------ 20171203
집으로 갈 때
지하 열차
흔들려
어깨
흐트러지고
어느 순간 귀에 꼈던
이어폰
음색
비틀어 질 때
이유도 없이
펼쳤던 책 덮으며
문득
오래된 기억 떠오른 듯
난
눈시울이 뜨거워 진다
어떤 세상과 세상
어떤
우연과
우연의 틈
그 사이에서 난
이렇게 숨쉬나
열차
아무 일도 없는
흔들림 속
난 서서
고민에 잠긴다
--------------------------------# (160412)
부산 가는 케이티엑스
애기랑 아빠랑
사람구경 하지요
애기는 이모 얼굴 보고요
아빠는 이모 다리 보고요
애기는 이모 앞태 보고요
아빠는 이모 뒤태 보고요
부산 가는 케이티엑스
애기랑 아빠랑
사람구경 아주 씐이 나지요
---------------------# (140315)
돌아가는, 밤중의 열차
차창 밖에 노오란
가로등 불빛이
아직도 그 빛이라서
다행스러웠다.
내게 머물렀던 것들은
언제까지
내게
머물러 줄 수 있을까
기차는 달리고
생각은 여전히 창에 기대어
지나버린 잔상을
좇아 헤맨다
--------------------------------# (150221)
갑시다
바다로.
이것은 물론 경험해본 사람만,
핏속에
그런 피가 흐르는 사람만
느낄 수 있는 별스러운 감정이겠지만
일단 갑시다.
쉼 없이 뒤채이는 바다,
거기엔 뭔가
알 수 없는 뭔가가
한마디로 말할 수 없는
뭔가가
거친 숨을 내쉬고 있으니.
그런 감상을,
그런 바다를 보지 못한 사람은
어찌할 수 없는
이해할 수 없는
별스러운 감정이겠지만
일단 갑시다.
가 봅시다.
그럼 알테니
몰라도 알테니
시월의,
그 끝자락의 끄트머리
어디라도 좋소,
그 바다로
갑시다.
--------------------------------# (141024)
반항하고 싶은 졸라게
개기고 싶은 뭔가 되게
억울한 느낌이 드는
내 반항의 역사는 올해로 마흔 해 째다
안그렇게 될 줄 알았다 적어도
나이 마흔 정도 되면
휘둘리지
않을 줄 알았다
세상이 연해지든
내가 단단해지든
뭐 그렇게 되어서
어린 날 스멀스멀 피어오르던
반항기는 곧
필요없는
쓸모없는 이를테면 꼬리뼈처럼
흔적만 남은
그럴듯하게 성장한 어른의
아스라한 먼 기억이 될 줄
알았다
발육이 덜 된 주변머리로
강변하던
덜익은 이유 따위는
어른이 되면
정말 때가 되면 사라져
줄 줄 알았다
변하지 않는 세상
탓 아니
변하지 못한
내 탓
어쨌든
그렇다는 거다
지금 반항하고 싶다는 거다
좀 그만 뜯어라
내 살점
내
살점이었던
생명이었던
코 끝 더운 공기
혀에 감기는 단내에
식도를 그득히 채워 넘기는 포만감까진
그렇다 치더라도
어쩌면
몸 속 돌고 돌아
또다른 생명
그 기적같은 이야기를 시작하는 씨앗이
될 수 있겠다 치더라도
그리 기 쓰고
훑어낼 것 까지는
검은 뼈 사이사이 벌려 가며
솎아낼 것 까지는
없지 않으냐
한 조각 티끌 정도는
남겨 줘라
내 살점
이 넓은 우주에서
어느 구석 한 줌 의미로 생겨났는지
나도
나를 말할 수는 없다
짧은 햇빛 마흔 아홉 날
숨쉬고
피 돌게 하며
다만 내가 있었음을 증명할
옹색한 증거
어쩌면
그마저 될 수
없을 지도 모르겠으나
어쨌든 그러하니
손톱만큼 남은
내 그것
그만 좀
발라내란 말이다
월요일 아침
지하철을 내리고 계단을 오른다
에스컬레이터는
내어맡긴 내 몸을 끌어 이끈다
등줄기로 흐른 땀
밖은 여전히
바람이 시릴 것이다
어깻죽지는 이미 뻐근하다
고개를 든다
한칸 위
여자의 옷
털실로 짠 굵은 모노톤 패턴
들여다 본다
무늬는 이어지고
이어진다
씨실, 날실은
연결되고
연결된다
나는 골똘하게
들여다 본다
어깻죽지가 잠시 풀린다
곧
에스컬레이터가 끝난다
..... 지하철 문이 열린다.
가방을 메고, 이어폰 음량을 약간 올리며 층계를 오른다.
어깨를 치고 지나가는 사람, 사람들.
다들 바쁜 걸음,
귀가의 행렬이다.
거리는 차갑다.
그 공기 사이를 비집고
속도를 내어 지나가는 자동차들의 소음
미술학원을 나서는 아이들의 왁자한 잡담
무겁게 여닫히는 두꺼운 유리문 소리
비틀거리며 옆을 지나치는 자전거의 경적.....
난 보폭을 넓힌다.
아까 접질린 왼쪽 무릎이 살짝 시큰거리지만
괜찮다.
뺨을 스치는 바람은 정확하게
이 계절만큼의 신선감과
상쾌함을 준다.
큰 길을 지나 어두운 골목,
뒤를 따르던 그림자가 앞장을 선다.
그 옆에 또 하나의 그림자,
그도 또한
나름의 목적지가 정해져 있을 것이다.
다리를 건너고
찻길을 지나고
살얼음이 언
보도블럭을 걷는다.
집이
가까워진다.
누군가가 미끄러운 입구에 박스를 깔아놓았다.
비번을 입력한다.
문이 열리고
계단을 오른다.
인기척에
전등이 켜진다.
나는 엠피쓰리를 끈다.
한발 한발
계단을 오른다.
전등이 또 하나 켜진다.
공기는 이미 따뜻하다.
목도리를 풀고
외투의 지퍼를 내리며
나는
초인종을 누른다.
설핏, 어디선가
고소한 찌개냄새를 맡은 듯 하다.
치르륵- 하는
새 소리도 들린 것 같다.
문이 열린다.
빛이 쏟아진다.
이마와 볼 전체로
온기가 퍼져온다.
“어서 와”
열린 문 사이로 손을 내밀며
아내가
환하게 웃는다.
집에,
도착했다.